한강

서울둘레길 3코스 중 고덕역에서 한강변을 따라 암사둔치생태공원까지

김시동 2022. 6. 29. 19:21

이 구간의 중심은 구암정(龜岩亭)

과 고덕산(高德山)이다. 선사시대, 청동기시대부터 현재까지의 역사가 있는 곳이다.

고덕산에서 조금 남쪽에 선사시대 유적인 서울암사유적이 있다.

고덕천에서 강변을 따라 구암정까지는 고덕대교 건설관계로 별로 볼 것이 없어 서울둘레길 3코스 중 고덕역에서 암사역까지 구간을 택했다.

고덕역에서 셈터근린공원을 지나 고덕산에 이른다.

고덕산에는 청동기시대(기원전 10세기경) 조성된 무덤 1,2호가 있으며 청동기시대부터 많은 사람들의 생활터전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2004년 세종대박물관의 조사과정에서 고인돌 1,2호기가 발견되었다.

그 크기가 작아서 아마 풍장(風葬)한 것으로 보인다. 죽은 사람의 장례를 두 번 행하되 가장(假葬)으로 생각되는 제1차 장에서 시체를 완전히 썩여 가지고 탈육된 유골을 본장이라고 생각되는 제2차 장으로 처리하는 장법이다.

삼국시대에는 지금의 구암정(龜岩亭)이 있는 곳에 백제(百濟)의 최초의 불교(佛敎) 효시(嚆矢)인 백중사(伯仲寺)가 있었으며 일명 암사지(巖寺址)였다고 한다.

고려의 절의충신(節義忠臣) 석탄(石灘) 이양중(李養中) 공이 고려가 망하고 개국하자 관직을 떠나 야인(野人)으로 고덕산 산자락에 와 은둔생활을 시작하고, 공은 고매(高邁)한 인격과 덕성(德性)을 가졌다 한다. 공의 품성에 걸맞게 우거지(寓居地)의 무명산(無名山)을 사람들은 고덕산이라 명명한 것이다.

조선 세종 때부터 연산군에 이르기 까지 일곱 왕을 섬기면서 도덕정치를 실천한 광릉부원군 이극배(1422~1495)와 그 후손들의 묘가 있다. 광주 이씨 광름부원군파 묘역(墓域)이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96. 11.)

이극배는 이인손(李仁孫)의 아들로 1447(세종29)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그 해 식년문과에 정과(丁科)롤 급제하였다. 그는 세조가 왕위에 오르는 데 큰 공을 세워 좌익공신(左翼功臣) 3등에 올랐고, 광릉군(光陵君)에 봉해졌다.1471(성종 16)에 우의정이 된 후 1493(성종24) 영의정에 올라 광릉부원군에 봉해졌다.

조선 선조조에 이시무(李時茂)각 국난평정(國難平定)을 기원하며 쌓은 토단(土壇)이 산 정상에 있다.

고덕산에서 강변쪽으로 양천허씨 선조님들의 묘소가 있다. 동자석이 근엄하고 다소곳하다.

이 묘역 바로 옆에 <STAGE28>이 있다. 태권브이 카페이다.

카페에서 고덕산 정상에서 고덕대교도 보인다.

강변으로 나오면 구암정(龜岩亭)이 있다. 단청이 아름답다.

구암정(龜岩亭)이라고 한 현액(懸額)은 이곳에 있었던 구암서원(龜岩書院)에서 이름하였다.

구암서원(龜岩書院)은 현종(顯宗) 기유(己酉)년에 광주사림(廣州士林)이 건원하였으며 숙종(肅宗) 정축(丁丑)년에 사액(賜額)된 서원(書院)으로서 유서(由緖) 깊은 곳이다.

구암서원(龜岩書院)에 배향(配享)한 육현(六賢)은 이집(李集), 이양중(李養中), 오윤겸(吳允謙), 임숙영(任叔英), 정엽(鄭曄), 정성근(鄭誠謹) 승지(承旨).

고종(高宗) 신미(辛味)에 중설(重說) 서원(書院) 철훼령(撤毁令)에 의하여 훼철(毁撤)되었으나 광주이씨대종회(廣州李氏大宗會)가 옛 제기고(祭器庫)에 구기비(舊基碑)를 세우고 수호(守護)하다가 1988년애 서울특별시가 취수장(取水場)를 건설하면서 바위절터 주변을 공원화 하고 역사적 유지(遺址)로 보존하고자 구암정(龜岩亭)을 건립하였다.

구암정 가까이 구리암사대교가 있다.

대교를 지나 한강공원 광나루지역에 오니 해가 저물러 간다. 넓은 잔디밭에서 해가 지는 것을 관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