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효사정(孝思亭)에서

김시동 2026. 9. 17. 19:17

효사정(孝思亭)는 한강변을 따라 가면 동작대교와 한강대교 중간에 있다.

 

동작대교 아래에 국악을 공연하거나 연습하기 좋은 공간를 마련되어 있으며 쉼터이기도 하다.

동작교을 건너 효사정까지 길은

완만하고 걷기에 아주 좋고 낚시를 하거나

혼자 연주도 할 수 있다.

효자성에 오르면 저 멀리 동작대교가 보이고 지금 한참 재개발 중인 반포디에이치틀레스트 아파트와 기존의 아파트와 함께 공존하고 있으며 한강버스(Hangang Bus) 지나간다.

아파트 사이로 남산도 보인다.

또 효사정 윗 쪽으로 여의도가 보인다.

그래서 한강을 끼고 수많은 정자 중 경관이 가장 뛰어났으며 현재까지도 서울특별시 우수경관 조망장소 중 하나로 선정됐을 만큼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강희맹(姜希孟)은 효사정기를 남겼는데 이 기문(記文)<신동국여지승락> 10권 금천현 누정로에 효사정(孝思亭) 기록되어 있다.

효사정(孝思亭)는 조선 세종 때 한성부윤(漢城府尹)과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노한(盧閈)의 정자(亭子)이다.

노한(盧閈)은 조선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교하(交河)이먀 자는 유린(有隣), 호는 효사당(孝思堂)이다.

1439(세종 21) 어머니 개성왕씨부인(開城王氏夫人)의 상을 당하여 선영에 예장(禮葬)하고 무덤 옆에 초막을 짓고 3년간 시묘(侍墓)하고도 서러워서 그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묘지 북쪽 까까이 깍아지른 듯 한 언던위에 정자를 짓고 때대로 올라 어머니를 생각하고 북쪽 개성의 아버지 묘소를 바라보며 효성을 다 하지 못한 것을 슬퍼하였다.

 

효사정이라는 이름은 노한과 동서지간이었던 호조참판 강석덕(姜碩德)이 지었으며, 손자 노사신과 정인지, 신숙주, 김수온, 서거정, 중국사신 채수, 기순 등이 효사정의 정취를 시로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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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성종 대에 헐린 것을 일제감점기 때 한강신사가 있던 자리에 19937월 복원한 것으로 효사정(孝思亭) 현판글씨는 공숙공 노 한이 17대 손인 당시 노태우(盧泰愚) 대통령(大統領)의 친필이다.

 

효사정에서 한강대교 쪽으로 내려가면 동작충효길이 시작한다.

동작충효길 입구에 심훈(沈熏)의 동상이 있다. 심훈 옆에 의자가 비워 있다. 누구든지 앉을 수 있다.

 

심훈(沈熏)이 태어나고 살았던 곳이 여기 있다.

효사정문학공원 정상부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바로 앞에 천주교 흑석동 성당이 자리하고 흑석동 성당에는 <심훈생가 터> 표석이 있다.

심훈은 일제강점기 상록수, 영원의 미소, 황공등을 저술한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영화인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했다. 1926년 영화 먼동이 틀 때에 원작 집필·각색·감독으로 참여하는 등 영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1932년 시집 그날이 오면을 출간하려다 검열로 인하여 무산되었다. 1935년 장편 상록수동아일보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되었다. 행동적이고 저항적인 지성인이었던 그의 작품에는 민족주의와 계급적 저항의식 및 휴머니즘이 기본정신으로 관류하고 있다.

 

심훈의 일생기가 동작충효길를 가득 채우고 있다.

 

심훈 동상 한강대교 쪽을 조금 더 가면 학도의용군현충비(學徒義勇軍顯忠碑)가 있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30여만 명의 학생들이 정쟁에 참가하여 그 중 5만여 명은 직접 총을 들고 전투에 참가했다.

특히 1950811일 포항지구 전투에 71명이 3사단에 배속되었으며, 그 중 48명의 학도의용병들은 후방의 지원이 끊긴 채 맨 몸으로 대규모의 적을 막아내고 장령하게 싸우다 꽃다운 청춘을 조국의 제단에 바쳤다.

당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산화하신 학도의용군들의 높은 뜻을 되새기고 충혼을 기리기 위해 1955625일에 건립추진위원회가 학도호국단 및 관계자들의 협조을 얻어 추모비명과 당시 전투에 참가했던 학도의용병들의 이름이 새겨진 학도의용군현충비(學徒義勇軍顯忠碑).

 

한강대교로 가는 길에 열매가 탐스럽다. 이곳 바로 한강대교 가까이에 한강수사자조혼비(漢江水死者弔魂碑)가 있다.

1935711자 동아일보 기사에 따르면, 1922년부터 13년간 한강에서 익사한 사람만 1천 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 중 자살한 자가 332, "과실"로 사망한 자가 201, 신원미상의 시신으로 발견된 자가 511명이었다.

 

한강에 빠져죽은 사람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19297'용산기자단'에서 세운 비석이다. 1910~1920년대에 한강 다리 건설 공사와 홍수가 많았는데, 이로 인해 공사 중 빠져 죽거나 홍수에 휩쓸려 죽은 사람이 많았다. 이를 기리기 위해 '용산기자단'에서 1922년부터 매년 위령제를 지냈는데, 위령제의 내용이나 언제까지 지속되었는지는 전하지 않는다. 어쨌든 이런 과정에서 위령제를 지내는 김에 비석까지 세우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방치되어 있다가 1970년대 경 홍수로 인해 쓰러졌는데, 1985년 한강 인명구조대원 김평산 씨가 넘어진 비석을 다시 세웠다고 한다.

 

한강대로 밑은 보트가 지나고 있고

한강다리위에는 노을이 지고 있다. 다리에서 보는 여의도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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