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내동는 덕양산(德陽山, 해발 124.9m)이 있는 곳이다.
덕양산 정상에서 동쪽으로 여의도, 관안산, 남산이 보이며,
서쪽으로는 행주대교, 김포대교를,
남쪽으로는 개화산(開花山), 궁산(宮山), 화양대교가,
북쪽으로 북한산(北漢山)을 조망할 수 있다.
동서남북으로 조망할 수 있어 덕양산(德陽山)는 군사요충지이다.
행주산성(幸州山城)은 덕양산(德陽山)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흙으로 쌓은 토성(土城)이다. 전체 둘레는 약 1km이며 현재는 약 415m 정도로 복원되었다.
산선의 남쪽은 한강, 동남쪽으로 창릉천(昌陵川)이 산성을 돌아 한강으로 유입되고,
동남쪽과 남족 일대는 급 경사지로 자연적인 요새지(要塞地)의 지형을 갖추고 있다.
산성은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로 서울대 학술조사단의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에 쌓은 성으로 밝혀졌다.
산성의 아래쪽에 행주기씨유허비(幸州奇氏遺墟碑)가 있다.
유허비(遺墟碑)는 기씨(奇氏)의 발상(發祥)한 세거지(世居地)가 행주(幸州)이며 이곳을 관향(貫鄕)으로 삼아왔고, 여선양조(麗鮮兩朝)에 많은 장상(將相), 학자(學者), 충신(忠臣) 등을 배출하여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성망(聲望)을 빛내었다.
또 유허비(遺墟碑) 조금아래에 기감천(奇甘泉)이 있다.
기감천(奇甘泉) 바위 밑에서 행주기씨(幸州奇氏)의 시조(始祖)가 태어났으며, 행주기씨는 행주와 덕양산 일대에서 대대로 살아왔으며, 일설에 의햐면 고려시대의 공녀에서 원나라의 황후가 된 기황후(奇皇后)도 이 지역에서 살았다고 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1593년 2월 12일 새벽, 서울에 집결하였던 왜군이 백제관 승리의 여세를 몰아 3만의 대군을 7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총공격하였다.
이듬해 권률장군은 2월 2천 3백명을 거느리고 양천강을 건너 고양의 행주산성에 주둔하였다. 이때는 중국에서 파견된 대장 이여송이 평양에 있는 적을 격파한 뒤이므로 평양 황해도 개성 및 함경도에서 후퇴한 적들이 모두 서울에 집결해 그 세력이 강대하였다. 장군은 소수의 군대를 거느리고 서울의 목덜미를 누르고 있었으나 워낙 적은 수였기 때문에 적군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이 달 12일 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산성을 포위 공격하였다, 장군은 군중에게 동요하지 말도록 주의시치고 성 안에서 화를 쏘며 돌을 굴려서 기어오르는 적을 격파하였으며 적이 목책에 불을 지르면 물을 쏟아서 이를 방지하였다. 일부의 적이 방위라 약간 허술한 쪽으로 들어오자 장군을 칼을 뽑아들고 앞장서 치열한 전투를 벌여 마침내 저녁 때까지 세차례의 격전 끝에 적은 마침내 전사자의 시체를 네 곳에 모아서 불태우고 달아났다. 이것이 이른바 행주대첩이다.
관군, 의병, 승군, 부녀자의 총력전으로서 임진왜란의 전제를 뒤엎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대외 항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특히 행주대첩에서 아낙네들의 돌나루기 항전은 유명해졌다. 이후로 아녀자들이 부엌에서 입는 앞치마를 가리켜 행주산성에서 행주대첩 때 입었다는 의미로 그 이름은 행주치마라고 하였다.
행주산성은 행주대첩의 역사적 전승지이며 한산대첩, 진주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 대첩지로 꼽히고 있다.
장군은 1599년 63세로 돌아가시니 나라에서 장군을 전무 일등공신에 올려 영가부원군의칭호와 의정주영의정의 관직과 충장공의 시호를 추증하였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35년(1602)에 그날의 승전을 기념하여, 공의 과거 부하였던 막료과 사병들이 공의 덕의(德義)를 사모하면서도 달리 표현할 방도가 없으므로 다투어 물자를 내놓아 이 비를 세우기로 하였으니 기특한 일이다. 덕양산 정상에 행주대첩비(幸州大捷碑)를 세워졌다.
헌종 8년(1842) 행주나루터에 조인영의 건의로 나라에서는 장군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한 사당인 기공사(紀功祠)를 창건하여 권율 도원수를 제향하였으며, 헌종 11년(1845) 정산의 대첩비가 마모가 심하여 같은 내용의 비(중건비)를 기공사에 세워 놓았다.
1963년 문화재 정화사업으로 세운 15.2m 높이의 행주대첩비가 있다.
1970년 행주산선 정화사업을 시작하여 권율 도원수의 영정을 모신 충장사(忠莊祠),
진강정(鎭江亭),
대첩비각(大捷碑閣), 대첩문(大捷門)이 건립되었다.
이후 1980년 대첩기념관(大捷記念館), 충훈정(忠勳亭), 충의정(忠義亭), 권율 도원수(權慄 都元帥)의 동상이 건립되어
오늘의 행주산성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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