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개화산(開花山)는 군사요충지이자 호국산이다

김시동 2023. 5. 3. 16:02

개화산(開花山)는 궁산(宮山)에서 조금 더 한강 하류로 내려가 있다. 이곳은 행주산성과 한강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한강하류로 흘러가다가 임진강을 만나 바다에 다다른다. 또 한강 상류로 한양을 조망할 수 있다.

 

1486(성종 17)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주룡산(駐龍山)으로 표기되었고, 조선후기 작성된 양천읍지(陽川邑誌)에 따르면 신라 때 주룡(駐龍)이라는 도인이 이 산에 머물렀다하여 주룡산(駐龍山)이라 이름하였고, 주룡 선생이 돌아간 후 기이한 꽃송이가 피어 사람들이 개화산(開花山)이라 불렀다 한다.

임진왜란·병자호란 전까지는 봉화불을 올렸다 하여 開火山(개화산)’이라 하였는데, 그 후에 開花山(개화산)’으로 이름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개화산과 행주산성은 서해에서 한양으로 진입하는 첫 관문이고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이다.

조선시대에 <신증동국여시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0(1530) 에 따르면 개화산봉수(開花山烽燧)는 동쪽으로 남산 제5봉과 을하고, 서쪽으로는 김포현 북성산(北城山)과 응한다.” 라 하여 봉수가 있었음을 전한다. 더구나 한강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이 있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에는 군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으로 여겨진다. 만일 남해안에 왜구가 쳐들어온다면 전남 순천에서 봉화가 시작되어 서해안과 종합 보고 되고 병조에서는 매일 새벽 승정원(承政院)에 알려 임금에게 보고하였다.

봉수대 아래엔 약사사(藥師寺)가 있다. 약사사는 개화산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사찰이다. 경내에는 삼층 석탑과 석불이 있어서 고려 후기에는 창건되었다고 유추된다.

봉수대 가가이 약사사가 있기 때문에 약사사(藥師寺)가 봉수대(烽燧臺) 관리했을 것이라 추측한다. 고려시대와 조선초기의 제도로 세금을 면하는 대신에 봉수대와 같은 곳을 관리하는 제도가 있었다.

 

1737년 이르러 송인명(宋寅明)이 개화사(開花寺)에서 공부하고 재상이 되어 그 인연으로 절을 중수하였고, 준조 이후에는 약사사(藥師寺)로 개칭하였다. 1827년 송순옥(宋叔玉)이 쓴 개화산약사암중건기(開花山藥師庵重建記)에 의하면 약사암이라 하고 삼한고찰(三韓古刹)로 표기 하였다. 조선후기의 겸재 정선은 개화사(開花寺)라는 제목으로 사찰과 주변 풍경을 그리기도 하였다.

 

약사사 바로 아래엔 풍산(豊山) 심씨(沈氏) 문정공파(文靖公派) 묘역(墓域)이 있다.

이곳은 조선 중종 때 정국공신이며 좌의정을 지낸 문정공(文靖公) 심정(沈貞, 1471~1531)과 그의 아들 심사손(沈思遜, 1493~1528), 심사순(沈思順), 그의 손자이며 선조 때 우의정을 지내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綠線)된 심수경(沈守慶, 1516~1599) 등 풍산 심씨 가문의 묘 60여기가 함께 있는 묘역이다.

이 가운제 심정의 묘 1, 심사순의 묘 1, 심사순과 부인 묘 2, 심수경과 부인의 묘2기가 신도비 1, 묘비 4기 상석 4기 문무인석 17기 등이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묘역은 심수경의 묘역으로 심수경과 부인 심씨의 묘, 묘비, 상석 망주석 문인석 등이 있다.

 

개화산(開花山)서쪽으로 미타사(彌陀寺)가 있다. 미타사 바로 위에 개화산호국공원이 있다.

6.25 남침 초기 개성에서 김포. 개화산지역까지 후퇴하면서 수차례 방어선을 구축하고 이를 사수하다 육군 제1보병사단 1,100여 명과 김포지구 전투사령부 예하 부대 무명용사가 산화하였다. 용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994호국충혼위령비(護國忠魂慰靈碑)건립하며 조성하였으며, 201712월 호국정신을 널리 선양하고자 명각비(名刻碑)를 비롯하여 추모의 벽, 기념조형물을 제작하여 여령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억하는 추모의 공간으로 새롭게 개화산호국공원을 단장하였다.

개화산(開花山) 건너편 행주대교을 잇는 양화대교가 있다.

양화대교 <아래에 투금탄(投金灘) 이야기> 안내판이 있다. 20196월에는 조형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안내판만 있다. 이야기의 장소가 양화대교가 아니고 증미산 아래인 까닭일 것이다.

 

투금탄(投金灘) 이야기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다. 어느 형제가 함께 길을 가던 중 아우가 금덩어리를 두 개를 주워서 하나를 형에게 주었다. 양천강(지금의 한강 공암나루터)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아우가 갑자기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형이 이상이 여겨서 물었더니 아우가 대답하기를, “내가 그동안 형을 매우 사람했는데, 지금 금덩어리를 나누고 보니 갑자기 형을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따라서 금덩어리는 차라리 강물에 던져 버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형도 네 말이 과연 옳구나.” 하고는 동생을 따라 금덩어리를 강물에 던져 버렸다.“

출처 [한강의 어제와 오늘,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고려사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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