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묘

공민왕(恭愍王神堂) 신당(神堂)은 수복(守僕)이 치성(致誠)드리는 곳이었다.

김시동 2023. 5. 12. 18:54

23 5 6일 종묘 공민왕신당에서 당제(堂祭)가 있었다.

 정식 명칭은 고려공민왕영정봉안지당(高麗恭愍王影幀奉安之堂)이다.

공민왕은 무속에서 인신계통(왕신계통)의 신앙대상이 되고 있다. 공민왕 대한 숭배는 민간에서 그 마을의 수호신(守護神)으로 신봉되어 화목과 단결을 진작시켰으며 아울러 마을 주민의 정신적인 지주(支柱)가 되었다.

원나라를 물리치고 강역(彊域:국경)을 회복하려 하였던 점과, 왕으로서 신하에 의하여 죽음을 당한 사실이 민중의 마음에 와 닿아, 뒷날 신령으로 모셔진 듯하다. 특히 안동지역에서 공민왕을 신앙의 대상으로 모시는 사당이 많다.

국가가 공민왕을 모시는 곳은 연천군 미산면에 숭의전(崇義展)이다.

 

공민왕신당(恭愍王神堂)이 종묘에 존재하는 시기를 언제일까.

종묘에 봉안된 영정은 한양에 새로 종묘를 지을 때 북쪽으로부터 회오리바람을 타고 날아와 묘정에 떨어진 것인데 이에 놀란 군신들이 사당을 지어 봉안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일제 강점기에 편찬된 종묘지(宗廟誌)인데 신당(神堂)’이란 항목에 나온다. 실제 옛 노인이 전해준 야설(野說)이다 라고 하였다.

 

1880년에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宗廟親祭規制圖說屛風)에 신당(神堂)이 나타나지 않으나

 

1892(고종 29)6월 헌종비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할 때 과정을 기록한 것인데 이에 의하면 당시 부묘에 앞서 종묘의 여러 건물에 대한 보수가 있었다. 망묘루, 대청직(大廳直) 온돌 다음에 나오는 신당 수리 기사는 서술의 순서로 볼 때 공민왕 신당을 가리키는 것이 확실하다.

 

대한매일신보 1908 9 8일자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려있다.

종묘 안에 잇 와 부군당의 우를 작일에 모다헐고 각위패

고유졔를 설엿다더라

 

종묘 내 칠사당과 부군당의 사우를 모두 헐고 매안하였다는 위 조치는 순종은 조령을 내려 대제(大祭), 별제(別祭), 속제(俗祭), 삭제(朔祭), 망제(望祭) 가운데 중요하지 않은 제사를생략하는 것과 더불어 신당에서 정사(政事)를 보는 날에 거행하는 고사를 폐지할 것을 지시하였다

 

종묘 직원의 관서일지인 전장기(傳掌記)에 의하면 1910 3 20일에 일본인 무라카미(村上)가 사람을 보내어 신당의 화정(畵幀) 5본을 철거하여 갔다가 사흘 뒤에 다시 돌려주었다고 한다.10) 그러므로 1908년에 철거된 신당은 곧바로 복원되었던 것을 알 수 있고, 이러한 신당은 일제강점기로 이어졌다

1911년에 작성된 대방하기(大房下記)의 회계책을 통해서 신당 내 의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1년의 기간 중 달마다 () 3일 고사(告祀)”, “15일고사”, “회일고사(晦日告祀)”  3건의 고사가 나온다. 마지막 회일고사는 다음달 초1의 고사 비용도 같이 지출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당시에 매달 초1, 3, 15, 회일 등 총 4회의 고사가 신당에서 거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11년 작성된 대방하기를 통해서 신당에 매달 4번의 고사와 1년에 2번의 치성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부군당에 소용되는 재원은 다양한 방식으로 마련되었다. 나라에서 지원하는 경우도 있지만 부군당의 주도 세력인 아전들이 갹출하여 재원을 마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수복이 신당을 운영한 것으로 본다.

 

1930년에 발행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신당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광복전후 종묘배치도(宗廟配置圖)에는 신당이 있던 곳에 목욕실(沐浴室)로 표기 되어 있다.

1880년에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宗廟親祭規制圖說屛風)에 신당 표시 없으므로 1890년 신정왕후(神貞王后) 신주가 봉안(奉安)하였던 시기 즉 1880년과 1890년과 사이에 종묘에 신당이 들어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때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가 무당정치를 할 때이다. 돈화문(敦化門) 앞 지금의 권농동에 무당집에 성행했다는 것과 신정왕후(神貞王后, 1808-1890)의 신주를 종묘에 봉안하기 전에 종묘 수리를 할 때 무당의 힘으로 종묘에 들어 온 것이 아닌가 한다.

적어도 신당 치성(致誠) 1930년과 광복후 사이에 신당 치성이 폐지되었다는 것으로 추정되며 광복후 언제인지 확인할 수 없으므로 종로구청에 치성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참고

종묘의 공민왕신당과 수복연구 / 이욱

한국의 무속 / 김태곤

공민왕 사당 제례 / 마포문화원 외 인터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