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천(炭川)은 상류쪽으로 왼쪽에 잠실(蠶室)과 오른쪽에 삼성리(三成里)가 있다.
삼성리(三成里)에 수도산(修道山)이 있고 한성백제(漢城百濟) 때 도성 외곽 방어시설이던 산성이 있었다고 한다.
삼성리는 지금의 삼성동(三成洞)으로 수도산(修道山) 아래에 봉은사(奉恩寺)가 있고 그 아래에 선정릉(宣靖陵)이 있다.
지금은 봉은사 아래에 무역회관과 국제교류센터복합지구가 있어 큰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1.봉은사(奉恩寺). 2.선정릉(宣靖陵) 3.국제교류센터복합지구 로 구분하였다.
1. 봉은사(奉恩寺)
794년(원성왕 10) 신라시대 연회국사(緣會國師)가 창건하여 견성사(見性寺)라고 하였다.
견성사(見性寺)는 선릉(宣陵)의 동편에 있었다.
연산군 4년(1498)에 선릉(宣陵)이 조영되면서 선릉(宣陵)의 원찰(願刹)이 되었고, 견성사(見性寺)을 성종의 은혜를 받는다는 뜻의 봉은사(奉恩寺)라 이름하였다.
중종에 이어 명종이 즉위하고 어린 명종을 대신해서 섭정을 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정책으로 조선 불교계는 일시 부활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봉은사도 이 때 보우스님의 활동에 힘입어 수사찰의 지위를 확고히 하게 한다.
문정황후는 1550년(명종 5)에 선교 양종을 부활하여 봉은사를 그 본산으로 하도록 하고, 연산군대 이후 실시하지 않다가 1507년(중종 2)에 완전히 폐지했던 승려들의 과거인 승과(僧科)를 「경국대전」에 의거하여 다시 시행하도록 하였다.
선교 양종의 부활에 따라 양종 체제가 다시 기능을 되찾으면서 봉은사는 선종 수사찰(禪宗首寺刹)이 되어 교종의 수사찰인 봉선사와 함께 불교계를 이끌게 되었다. 이때부터 봉은사의 사격이 전국 으뜸을 자랑하게 된 것이다. 1551년(명종 6)에 특명으로 보우스님을 판선종사 도대선사(判禪宗事都大禪師) 봉은사 주지(奉恩寺住持)로 삼아 판교종사 도대사(判敎宗事都大師) 봉선사 주지(奉先寺住持)에 임명된 수진(守眞)스님과 더불어 명실 공히 선교 양종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정식 직함에 따라 보우스님의 활동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준 것이다.
1552년에 승과에 급제했던 서산대사 휴정이 1555년 여름에 교종판사가 되었다가 가을에 선종판사가 되어 봉은사 주지를 맡았다. 그러나 1557년에 휴정은 봉은사 주지를 사직하고 금강산으로 들어가 수행에 전념하였다.
1562년(명종 17) 9월에 선릉의 동쪽 기슭에 있던 옛 봉은사 터에 중종의 정릉(靖陵)이 천장되었다. 중종은 처음에 왕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묻힌 희릉(禧陵)에 나란히 묻혔었다. 그런데 문정대비는 자신이 나중에 돌아가면 중종의 곁에 함께 묻히고 싶은 생각에서 중종의 능을 봉은사 터로 옮기도록 하여 정릉이 이곳에 자리 잡게 되어 봉은사(奉恩寺)는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다.
1565년 (명종 20)에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별세하고, 보우대사가 판사직을 박탈당함. 보우대사가 제주로 유배 갔다가 목사(牧使) 변협(邊協)에 의해 살해되었다
1575(선조8)에 아병당 유정이 봉은사 주지가 되었고, 1592(선조25년) 임진왜란과 1636년(인조14년) 병자호란으로 당우가 소실되었다.
봉은사에서 대사와 허균의 첫 만남 장소이기도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의 전별(餞別)하기도 했었다고 한다.
1592년의 임란을 거치며 봉은사도 피해를 입었으나 절의 대체적인 모습은 유지되었다. 1612년(광해 4)에 광해군은 벽암각성(碧巖覺性, 1575-1660)을 봉은사 주지로 머물게 하고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의 직위를 주었다. 승군을 이끌었던 당시 중심인물이었으므로 봉은사도 이때 피해 입은 당우의 중건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1692년(숙종18)에 숙종이 절에 행차하여 돈돠 비단을 후사하여 불사를 독려하였다.
그 후 영조(英祖)와 정조(正祖)도 불사를 크게 일으켰다.
1855년(철종 6)에 남호 영기(南湖永奇)대사가 발원하여 『화엄경』을 판각하는 불사를 시작하고, 화엄경(華嚴經) 80권 등 전(版殿) 경판을 보관할 판전(板殿)을 지었다.
1856(철종9)에 추사(秋史)가 판전(版殿)의 글씨를 섰으며 현판은 화엄경판의 각성을 봉축하기 위해 쓴 것으로 여겨진다. 김정희는 1852년 북청(北靑) 유배지에서 풀려난 뒤 과천(果川)에 있는 자신의 별서(別墅) 과지초당(瓜地草堂)과 봉은사를 왕래하면서 서예와 신앙생활로 한가롭게 보내다가 1856년 10월 10일에 71세로 별세하였는데, 이 현판은 그가 별세하기 사흘 전에 쓴 것이라고 전한다.
1870(고종 7) 주지 호봉(虎峰)선사가 「흥선대원군불망비」를 건립하였다.
1902 사찰령이 제정되어 봉은사 등 전국의 14개 사찰이 수사찰로 지정되고 1911 조선총독부의 사찰령 시행규칙이 반포, 봉은사가 30본산의 하나가 되어 80여 사암 관할하게 된다.
1925 을축 대홍수 때 인명 708인을 구제하였다고 한다.
근세에 법왕루(法王樓) 현판 대도량(大道場)글씨는 위창(葦滄) 선생이,
수도산(修道山) 봉은사(奉恩寺)은 초정 권창륜 (艸丁 權昌倫)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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