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실대교 남쪽으로 한강을 건너면 롯데월드타워가 있는 잠실(蠶室)이다
잠실지역은 한강변에 성내천(城內川)과 탄천(炭川)를 사이에 있으며 이곳에 한강길, 탄천길과 성내천길 둘레길이 있다.
백제시대 때 송파지역은 풍납동토성(風納洞土城)과 몽촌토성(夢村土城)의 변두리가 되며 이 변두리에 방이동고분군(芳荑洞古墳群)과 석촌동고분군(石村洞古墳群)이 있다. 지금도 잠실의변두리 지역에 있다.
1917년 9월 방이동고분군(芳荑洞古墳群)이 처음으로 확인되어 백제 초기의 유적으로 보고되었다. 1976년에 처음으로 발굴조사되었으며, 1979년 12월 28일에 사적 제270호로 지정되었다. 1983년 서울특별시가 복원공사를 실시해 지금의 고분공원으로 조성되었다. 1976년에 3기가 발굴된 후 백제고분설과 신라고분설이 대립되어 있다.
석촌동고분군(石村洞古墳群)은 1911년 석촌리 일대 지표조하기 시작하여 1987년까지 여러차례 발굴조사를 하였다. 백제초기에 만들어진 돌무지무덤이 있다. 고구려식과 백제식 무덤이다. 3호 돌무지무덤은 4세기 후반경의 왕릉으로 추정되고 있다.
잠실지역 지도에서 삼전도는 1439년(세종 21년) 신설되었는데 이는 한강에 설치된 최초의 나루터 중 하나였다. 삼전도(三田渡)는 서울과 부리도(浮里島)를 연결하는 나루터로서 교통의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인조14년(1636) 청태종(淸太宗)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키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피신하고 있던 인조(仁祖)가 한강나루터였던 삼전도(三田渡)로 나와 청태종의 신하가되는 의례를 거행하였다. 이에 인조17년(1639)에 청태종의 공덕비를 세웠다. 이수(螭首)에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라 했으며 귀부(龜趺)도 있다. 청의 요구로 더 큰 공덕비를 세우라는 청의 요구로 공덕비(功德碑) 옆에 또 하나 귀부(龜趺)가 있다. 이 삼전도비(三田渡碑)는 고종32년(1895)땅 속에 묻었던 것을 1917년 일제의 총독부가 다시 세웠고, 1956년 문교부 주도로 또다시 묻히는 등 수난을 겪었다. 이후 홍수로 공덕비의 모습이 드러나면서 자리를 옮겨 다시 세웠고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됐다.
1741년에 겸재 정선(鄭歚)이 그린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의‘송파진(松坡津)을 보면 가운데 관아의 왼쪽 마을은 송파, 오른쪽 비각 아랫마을은 삼전이다. 오른쪽 초가집 위로 보이는 단칸 기와 건물이 삼전도 비각으로 보인다.
삼전도나루에서 나루의 기능이 송파나루로 변한 것을 알수 있는 옛 모습을 보여준다. 삼전도비의 존재와 비의 위치를 알려주고 있다.
1750년에 영조때 만들어진 해동지도와 1861년 김정호의 대도여지도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한강은 잠실섬 북쪽보다 남쪽의 강폭이 더 크게 그려집니다. 광장동의 나루보다 송파진이 더 발달하고 있습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이전에 신천(新川)이라는 명칭이 조선 후기 이후에 나오는 걸 보면 한강의 장기적인 유역 변화가 있었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이때까지도 한강의 본류는 잠실섬 남쪽이었고 잠실은 한강 이북 땅이었습니다.
이곳은 강물이 많아서 1950년 말경까지는 나룻배가 다녔으나 비만 오면 잠실섬이 잠겨 모두 침수되고 교통수단은 나룻배 한 척이고 나룻배를 타지 않으면 가기가 어려운 잠실섬 1965년 12월 경향신문 기사에는 2천여 잠실주민은 나룻배 사공이나 모태톱 채소밭 등으로 근근히 살아갔다. 이 낙도(落島)의 학우 들을 돕기 위한 학우돕기 운동도 했다.
여름 수해 때는 SOS를 알릴 수단이 없어 발을 동동 구르면 주기만기다리다 미군 헬리콥터가 출동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는 것이다.
1966년부터 시작된 강남건설은 1970년대 이후 들어 가속화되었고,
잠실은 강의 상류에서 내려온 퇴적물이 쌓여서 형성된 하천 내부의 섬으로 부리도, 잠실도가 있던 지역이다. 1970년대 초 잠실 주변 공유수면매립공사가 완공되어 약 1,124만㎡의 대규모 부지가 형성되었다.
잠실대교 1970년 10월에 착공하였고, 1972년 7월에 준공하였다. 한강에 건설한 서울의 6번째 다리로, 완공 당시에는 마포대교에 이어 한국에서 2번째로 긴 다리였다.
잠실대교 하단에 잠실수중보를 설치되어 한강의 수위를 조절하는 저수시설로 1985년에 완공되었다. 대교 남쪽에 어로(御路)가 있다. 이 길로 곧장 가면 송파 나들목, 성남시가 나온다.
잠실지구 개발공사로 잠실섬과 송파 사이로 흐르는 지류(송파강)을 막아 육지로 만든 것이 1971년 4월이라고 합니다. 송파강이 흘렀던 흔적은 남겨놓은 석촌호수로 알 수 있습니다.
1974년 서울시는 이 지역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을 시행하기 전에 마스터플랜 성격의 「잠실지구종합개발기본계획」을 수립하였는데, 10만 명 이상의 인구를 수용하고 상업과 주거공간이 어우러진 입체적인 도시구상이었다.(1975.02.06.)-잠실종합계획도 조감도
1975년에는 강남구가 성동구에서 독립하여 본격적인 행정구역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잠실 개발계획이 발표되어 잠실이 아파트 단지로 변모해가고, 여의도, 영등포, 천호 등 한강의 남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도시지역이 확장되었다.
1976년 아파트 지구 지정을 계기로 본격적인 인구이동의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977.10 지하철2호선을 따라 잠실 개통되고 1974년에서 1978년 사이 남산 3호 터널, 한강교량과 도로 건설 등으로 인해 강남북을 연결하는 도시 기간시설이 확보되어 서울은 하나의 도시로 유기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였고, 비로소 강남은 사람들이 모여들고 살만한 곳인 '신천지'로 인식되었다.
1977년 입주한 잠실주공5단지, 그 때는 잠실고밀도아파트라 불렀답니다.
1978년 총공사비 32억을 투자해서 석촌호수를 정비하는 계획을 수립되었다. 호수 중앙에 너비 40m 길이 85m의 다리를 놓고 굴레에는 옹벽을 쌓아 도로로 포장하고 녹지를 만들어 시민위락시설을 조성하기로 한다.
1978.10월 잠실학생체육관과 주변 공사 시작한다.
서울시는 기존 체육시설만으로는 국제적인 경기를 개최하는데 한계가 있자, 남서울대운동장 건설계획을 추진하였다. 이 사업은 김수근의 계획안을 기본으로 하여 면적 545,000㎡,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스포츠 시설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1981년 9월과 11월에 제24회 올림픽경기대회 및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의 서울 개최가 확정되자, 남서울대운동장 건설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1984년에 남서울대운동장를 개장하였다.
1984.12월에 잠실 아시아선수촌아파트 분양되었다.
1988년 서울에서 개최된 의미 있는 올림픽이다. 잠실종합운동장은 올림픽주경기장이기도 했다.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두 번째, 세계에서는 16번째로 열린 올림픽으로 그간의 이념 분쟁이나 인종 차별의 갈등과 불화를 해소한 대회로 평가된다. 우리나라는 금메달 12개로 종합 4위에 올라 역대 최고 성적을 올렸다.
주경기장 옆에 잠실야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열리고 있다.
롯데월드타워(Lotte World Tower)는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올림픽로 300에 위치한 마천루이다. 2016년 12월 22일에 완공된 후 2017년 4월 3일에 개장하였다.지상 123층, 높이 555m의 마천루로 2020년 12월 기준으로 대한민국 최고층 건물이자 세계에서 5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잠실지역은 주거지역과 롯데원드타워 중심으로 상업지역 종합운동장 중심으로 스포츠 지역 석촌호수 중심으로 위락지역 고분중심으로 문화지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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