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정릉(宣靖陵)은 삼성리(三成里)에 있으며 수도산(修道山)을 배산(背山)하고 탄천(炭川)과 양재천(良才川)이 감싸고 있다. 또 삼성리(三成里) 수도산(修道山)에 토성이 있어 한강을 조망하며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축조 후 200∼300년가량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잠실과 뚝섬의 오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이 길목에 선정릉(宣靖陵)의 원찰(願刹)인 봉은사(奉恩寺)가 자리한다. 수도산(修道山)은 지금의 삼성동해맞이 공원으로 추정된다.
해동지도海東地圖』에 그려진 정릉과 봉은사, 18세기
선정릉(宣靖陵)은 선릉(宣陵)과 정릉(靖陵)이다.
솟을 대문이 있는 재실(齋室)이 있다. 재실(齋室) 서쪽에 500년된 은행나무가 있다.
선릉(宣陵)은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 정자각(丁字閣)이 있는 언덕에 성종(成宗)의 릉이 있고 오른쪽 언덕에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 릉이 있다.
성종의 비(妃) 공혜왕후(恭惠王后)는 승하(昇遐)하자 예종비(睿宗妃)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韓氏)의 공릉(恭陵)과 마주하고 있는 순릉(純陵)에 모신다. 장순왕후(章順王后)와 공혜왕후(恭惠王后)는 한명회(韓明澮)의 딸로서 자매지간이다.
성종(成宗)이 승하(昇遐)하였지만 순릉(純陵)을 떠나 선릉(宣陵)에 모시게 된다.
폐비(廢妃) 윤씨(尹氏)가 승하하자 폐비(廢妃)임으로 묘호(廟號)를 회묘(懷墓)라 하고. 고양 서삼릉(西三陵)에 예장(禮葬)한다. 1504년 연산군은 윤씨 묘를 능으로 승격시키고 묘호를 회묘에서 회릉(懷陵)이라 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폐위되자 다시 회묘를 격하된다. 연산군이 조성한 회릉의 모습 그대로 갖추고 있다.
정현왕후(貞顯王后) 윤씨(尹氏)는 연산군의 어머니 윤씨가 폐위되자 이듬해 1480년에 왕비(王妃)로 책봉된다.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아들 진성대군(晉城大君)이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중종(中宗)이 된다. 선릉(宣陵)에 모신다.
정릉(靖陵)은 중종(中宗)의 릉이다.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은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가 폐위되자 1507년 왕비로 책봉되고 인종(仁宗)를 생산 후 산후병으로 승하한다. 초장(初葬)은 태종(太宗)의 헌릉(獻陵)이다. 1537년에 희릉(禧陵)에 이장(移葬)하였다.
중종(中宗)은 1544년에 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승하한다. 고양에 예장(禮葬)하고 묘호(廟號)를 중종(中宗), 능호(陵號)를 희릉(禧陵)으로 했다가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의 희릉 오른쪽 언덕에 정릉(靖陵)으로 조영한다.
1502년 문정왕후(文定王后)에 의해 현재의 선릉(宣陵)의 동쪽에 정릉(靖陵)자리로 이장(移葬) 하였다.
비(妃)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는 중종반정으로 진성대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왕비의 부친 신수근이 반정으로 참살되어 폐출된다. 친정묘역이 있는 장흥에 장사지냈다. 능호(陵號)은 온릉(溫陵)이다.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尹氏)의 능은 태릉(泰陵)이다.
고승 보우(普雨)를 앞세워 불교 부흥을 도모하였다.
왕후는 서삼릉에 있던 정릉(靖陵)을 보우가 주지로 있는 봉은사(奉恩寺) 옆으로 천장(遷葬)하고 자신도 그 곁에 묻히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태릉(泰陵)에 예장(禮葬)하고 능호(陵號)를 신정릉(新靖陵)이라 했다가 태릉(泰陵)으로 고쳤다.
정릉(靖陵)에 묻히고자 하는 문정왕후(文定王后)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선정릉(宣靖陵)은 도심 가운데 있어 우리 가까이에서 편하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고리가 된 것이 아닐까 한다.
'한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삼성리(三成里) / 3. 국제교류센터복합지구 (0) | 2022.11.03 |
---|---|
서래섬 (0) | 2022.10.19 |
삼성리(三成里) / 1. 봉은사(奉恩寺) (0) | 2022.09.20 |
한강종합개발기념비 (0) | 2022.09.06 |
잠실지역 (0) | 2022.08.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