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릉

정릉(貞陵)

김시동 2018. 6. 8. 17:55


선원계보(璿源系譜)에 태조(太祖) 계비(繼妃)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를 모신 곳이다.




태조의 원비는 신의왕후(神懿王后) 한씨(韓氏)다. 태조 즉위 전인 고려 공양왕(恭讓王) 3년(1391)에 사망했기 때문에 태조 즉위년에 절비(節妃), 태종(太宗)8년 추상(追上) 묘호(廟號)를 제릉(齊陵)이라 하였다.

조선 왕조의 최초 왕비가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康氏)다. 신덕왕후는 태조 즉위년에 현비(顯妣)로 책봉(冊封)되었으나, 선원계보(璿源系譜)에 태조의 계비(繼妃)로 되어 있다.

초장(初葬)는 한성(漢城) 황화방(皇華坊) 북원(北原)에 있었으며, 태종9년 양주(楊州) 남사하리(南沙河里)에 이장(移葬)했다. 현종(顯宗)10년 추상(推上) 묘호(廟號)를 정릉(貞陵)이라 했다.

태조가 승하(昇遐)하고 종묘(宗廟)에 부묘 할 때 태조(太祖)와 신의왕후(神懿王后)만 부묘(祔廟)하고 신덕왕후(神德王后) 한씨(韓氏)는 현종(顯宗) 10년에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하였다.

정릉(貞陵)이 대략 정동에서 지금의 자리로 이장했을 때는 왕릉(王陵)이 아니라 묘(墓)로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현종 10년에 묘호(廟號)를 정릉(貞陵)으로 추상(追上)했기 때문에 정릉은 일반적인 왕릉의 규모에 비교해 협소하다.

홍살문(紅箭門)에서 정자각(丁字閣)으로 진입하는 신로(神路)가 직각으로 진입하게 되어 있으며 무인석(武人石)이 없다.

정릉(貞陵) 문인석(文人石)은 


현재의 정릉을 조영한 시기의 장릉(長陵) 문인석(文人石)과 같은 스타일이다.

장릉 문인석

건원릉(健元陵)의 장명등(長明燈)

 장릉의 장명등(長明燈)과

 비교해 보면 과장된 면이 있으며, 

이는 무인석(武人石)이 차지하는 공간을 대체하여 장명등을 과장되게 만들고 크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비각(碑閣)는 영조46년 조영되었으며, 비각 안에 있는 묘표(墓表)는 고종(高宗) 때의 것으로 대한신덕황후정릉(大韓神德皇后 貞陵)이다.


 

최근에 제실(祭室)이 조영되어 있다.


현재의 정릉은 숲으로 쌓여 있어 도시인의 쉼터로서 역할을 하기도 한다. 정릉 둘래길은 자연과 필링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마침 개천에 올챙이와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인다.